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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연천/파주문화재를 찾아서2-연천/파주편

오색장미빛 2012. 3. 19. 09:24



철원,연천,파주문화재를 찾아서 
2편:연천,파주편
2010.3.3.수..용미리 마애불석불입상을 모신 용암사에서 연천,파주에 숨어 자란 우리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2편 언제: 2010.3.1.월요일~ 3.3.수요일(2박3일) 어디: 철원, 연천, 파주 누구: 반려자와 둘이서 둘쨋날:3월2일.화요일 여행기1편에서 승일교-고석정-재인폭포-한탄강 관광지에 이어 이곳 2편에선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를 시작으로 둘러 본다. 전곡 선사유적지-경순왕릉-고랑포구-호로고루-문산 월롱역 전곡리 구석기유적 [全谷里舊石器遺蹟] 전곡리 구석기유적 [全谷里舊石器遺蹟]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의 한탄강변에 있는 중부 홍적세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구석기 유적. 사적 제268호. 1978년 미군 병사 보웬이 처음 확인한 이후 10차례 발굴 조사된 이 유적은 전곡읍 남쪽 일대의, 한탄강이 U자 모양으로 감싸고 도는 대지상(臺地狀)의 지형에 분포하며,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3', 북위 38°1'이다. 이 일대에는 ‘전곡현무암 (全谷玄武岩)’이라 부르는 철원-평강 지역에서 흘러온 현무암이 고기하천 (古期河川) 퇴적을 덮고 있는데, 하부(下部)의 연대가 약 60만년 전, 상부의 현무암이 약 30만년 전후로 알려졌다. 현무암 대지 위에 두께 3~8m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현무암 대지 위를 흐르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퇴적물 속에서 석기가 발견되었다. 퇴적층은 하부에 우각호(牛角湖)에 의해 퇴적된 호소성(湖沼性) 퇴적물 또는 강에 의해서 퇴적된 모래층으로 구성되었고, 이 위를 적색 또는 황갈색 점토가 덮고 있다. 이 퇴적물은 현무암이 절리(節理)현상으로 인하여 빠른 속도로 침식되는 과정을 고려한다면, 현무암 상부의 30만년에서 많이 떨어지는 시기가 아닌 대략 중부 홍적세의 후반 20만년 전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직 신뢰도에 문제가 있지만 퇴적물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iscence dating method)에 의하여 얻은 4만 5천년 전이라는 연대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상부홍적세에 들어서 급격히 침식되어 현재의 지형을 형성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어! 언제 지게로 나무를 해 왔지? 구석기인들이 아직도 여기서 사나 봐요. 지금까지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는 4천여 점이 넘으며, 지표에서 채집된 석기도 많다. 석기는 석영암(石英岩)과 규암(硅岩)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며, 현무암과 편마암도 약간 섞여 있다. 재료는 거의 강바닥에서 채집된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류이고, 평면이 첨두형인 것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주먹도끼류와 한 면 가공된 주먹도끼(handaxe) ·가로날도끼(cleaver) ·뾰족끝찍개(pick)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찍개 ·긁개 ·다각면원구 ·소형찌르개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외에 많은 수의 몸돌[石核] ·격지[剝片] 및 부스러기돌 등이 발견되었다. 석기는 대부분 직접타격법 또는 모루떼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며,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2차 가공을 시도한 것은 극히 적다. 2차 가공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가공에 그치고 있어서 동아시아의 전기구석기의 일반적 양상인 석기의 비정형성이 나타난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 ·아프리카의 아슐리안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처음 발견한 이는 그렉 보웬이라고 하는 미 공군하사관이었다. 그는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 동두천 미군 2사단 헬리콥터장 기상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는 석기에 관심이 많았고, 자케타 보르다즈라는 석기 전공교수로부터 많은 지식을 쌓은 처지였다. 1977년 한국에 온 그는 미군 영내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한 젊은 여성과 사귀었는데, 결혼을 약속한 이들은 78년 1월 20일 한탄강 유원지로 같이 놀러갔다. 지금은 한탄강 유원지가 공장폐수와 음식점으로 엉망이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곳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무튼 강변을 산책하던 그는 우연히도 강가의 모래둔덕이 길을 내느라 잘려 나간 곳에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가 노출된 것을 발견하게 됐다. 1년여 만에 고고학 유적을 접하게 된 그는 매우 흥분하여 그 일대를 좀더 조사해보고자 영문도 모르는 애인을 무조건 뒤를 따라 오게만 하고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한시간이 넘도록 별 소득도 없고 추운 날씨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 애인도 있고 해서, 요기나 하자고 생각한 그는 애인과 함께 앉을 만한 곳을 찾았는데,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 잔디가 잘 깔린 묘역이 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배낭을 내려 놓고 물 끓일 차비를 하던 그에게 갑자기 주먹도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충격에 그는 들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집어들고는 어리둥절한 애인에게 “봐! 봐! 내가 뭘 찾았는지 좀 보라구!” 하는 소리를 정신없이 외치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주위를 계속 찾던 그는 주먹도끼 3점, 가로날도끼 2점과 긁개 1점을 발견했다. 전곡리 유적이 드디어 길고도 긴잠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에 그는 바로 귀대 해 사진기를 빌리고 군용작전지도를 한부 구한 다음, 다시 현장으로 뛰어왔다. 정확한 발견지점을 지도에 표시하고 현장과 유물사진을 찍은 그는 1주일여에 걸쳐 막사에서 자세한 보고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흥분 속에서 자료는 정리했지만, 이 중요한 발견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 몰라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고고학자가 있는지, 또 있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를 애인과 부대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게 물어 봤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프랑스 보르도대학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 교수에게 무조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보르드 교수는 발견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냈다. 즉 “만약 이것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됐다면 나는 이것을 의심없는 아슐리안 문화(☻ 유럽,아프리카,중동, 인도에 걸쳐 발견된 전기 구석기 시대의 한 시기 이름이자 문화 이름. 특히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라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양면가공석기가 중요한 지표유물이다. 가장 오래된 아슐리안 유적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백4,50만년전의 유적이고, 대체로 8-10만년전 사이에 다른 문화로 대체됐다.)의 석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자신 직접 현장을 보고 싶은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여건상 그럴 수 없으니, 한국에 있는 학자들을 접촉하십시오. 여러해 전 서울대학교 에서 유학생을 보낸 적이 있으니, 서울대학교에 연락해 보십시오” 라고 써 보냈던 것이다. 보웬이 보낸 편지가 서울대 고고학과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3월 중순 이었다. 4월15일 휴가를 받은 그는 서울대로 찾아왔고, 필자의 길안내로 당시 서울대가 발굴하고 있던 여주 흔암리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에서 김원룡 교수를 만나게 됐다. 한국사람으로 전곡리 유물을 처음 본 셈인 필자는 당시 4학년 휴학생이었는데, 어린 눈에는 그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꺼낸 돌덩이들이 책에서 그림으로 보던 것과 비슷해 신기하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김교수께서는 매우 흥분하셨고, 이 유적을 바로 보고 싶다는 욕심에 허겁지겁 서울로 올라가셨다. 필자는 보웬과 현장에서 더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흘을 같이 지내는 동안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 유적 발견에 얽힌 얘기를 장황히 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 그에게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곡리에서 발굴이 시작된 것은 그해 11월 발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지 넉달이 지난 79년 3월이었다. 귀국후 보웬은 아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자식들과 같이 잘 살고 있다. *전곡유적지에서 옮김 -1978년 한탄강변서 美軍이 발견- ◇ 미군이 발견한 주먹도끼 1978년 4월. 동두천에 주둔중인 미공군 기후 예보대에 군무하던 그렉 보웬 병사는 평소에 사귀던 한국여성과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다. “이게 뭐지?”. 여인은 이상하게 생긴 차돌 하나를 주워 보웬에게 흔들어보았다. 자연석 같기도 하고,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웬 병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던 김원룡 교수에게 이 주먹도끼를 보냈다. 돌멩이 하나에 담겨진 한반도 27만년전의 역사가 한 외국인 병사에 의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차돌을 쥔 김원룡 교수는 즉각 프랑스에서 구석기를 전공한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채집되는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 즉,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의 형태가 프랑스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 중기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유사함을 확인한 뒤 현지조사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다. 이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타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 약 1백50만년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백50만년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년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년전) ·중기(10만년~4만년전)·후기(4만년~1만년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때까지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에서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에 정설로 굳어져 있었으니 전곡리 전기 구석기 유적의 확인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전곡리유적지 관람을 마치고 경순왕릉으로 이동중 고랑포구를 만난다. 고랑포구 가운데 고랑포와 윗고랑포 사이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로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와 연결 되었던 곳이다. 옛 문헌에 '고랑도' 로도 기록되어 있는 이곳은, 한국전쟁전까지 임진강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의 하나이며 주변에 대규모의 저잣거리와 화신백화점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으로 상권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 새우젓, 소금배들이 장단의 대표적 부산물이었던 콩, 땔감, 곡물을 교역하였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경기 북부 지역 농특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무성하게 우거진 갈대숲만이 옛 나루의 명성을 대신하고 있다. 신라 경순왕릉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 산18-2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의 후손이다. 즉위당시 군웅할거,국력쇠퇴... 후백제 견훤 침략등등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 큰아들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梵空은 화엄사(삼국유사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한다. 귀부후 正承公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자녀를 두었으며 978년 세상을 떠났다.(90세이상 장수하였음) 당시 수도 송악에 거주민의 3/2가 신라 유민이었다하며 그 신라 유민들에 의해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하여 이곳 장단 고랑포 聖居山에 왕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모셨단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등등으로 失 傳 ...수차례 정비 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각과 재실은 1987년 재건립된것이란다.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찬(伊湌) 효종(孝宗)의 子이며 母는 헌강왕(憲康王)의 女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 경애왕이 鮑石亭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의 재위시기는 나말(羅末) 전란시대로 영토는 왕건과 견훤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다.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를 열고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들간에 찬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侍郞 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리고 나서 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宮東의 甲第(으뜸가는 집)一區를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正承公 고려사에는政丞公)을 봉하여 位在太子之上에 두고 給祿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의 식읍으로 하고 또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고려 경종 3년(978) 4월 4일 별세하자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시고 능을 조영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능의 시설은 봉분 곡장 능비 장명등 망주석이 있고 봉분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경순왕릉에서 우릴 반갑게 맞으며 해설해 주신 자원봉사선생님이십니다. 화,목요일 주2회 활동으로 마침 화요일이어서 만나게 되었네요. 유명하신 정치가님도 이곳에 댕겨 가셨다 하시면서 여담도 나누며... 독일에서 14년간 계시다 연천이 좋아 둥지 틀면서 현재 임진강 캠프장원장님이시면서 교사심성수련 강사 등 여러직함으로 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밝고 고운모습으로 해설을 친절하게 너무 잘해 주셔서 이곳을 빌려 감사드립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참 좋은 분들을 만납니다. 이 또한 여행의 妙味 아닌가 합니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와 하늘을 본다. 새들의 비행이다. 무리지어 날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마치 내가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듯 시원도 하다. 한마리, 두마리,세마리....스물두마리 맞나요? 앗! 한마리 더...! 연천 호로고루 경순왕릉관람을 마치고 고랑포구를 지나다 만난 이정표다. 배수펌프장 옆이다. 화살표방향으로 들어서면 호로고루..도로에서 보인다. 쭈욱 들어가다가 주차장에 자동차 주차시키고 화살표 방향으로 걷는다.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은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感潮)구간의 상류에 위치하여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渡河)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위치하고 있다. 평양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는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방면 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일대의 임진강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호로고루성의 첫번째 설은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 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호로고루성의 두 번째설은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와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발굴조사로 석축성벽이 구축되기 전 목책단계가 있었음이 확인 되었는데 이는 임진강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즉,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유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면서 임진강 유역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한 결과로 이는 성의 입지와 성내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유물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호로고루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구려 기와류이다. 유물로는 절풍이라고 하는 고구려 관모의 실질적인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는 토제 모형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도량형을 이해할 수 있는 저울추와 도침, 삼족벼루, 도침형태의 토제품 등 지금까지 출토 예가 없는 다양한 유물자료를 확보하였다. 또한 창고시설에서는 쌀, 콩, 조 등의 탄화곡물과 소, 말, 사슴, 개,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 뼈가 수습되었으며 금속유물로는 화살촉과 도자류,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었다. *옮긴글 뒤쪽에서 살펴 본다. 발굴후 모아놓은 돌무덤위에 올라서서 서향의 햇님이 구름사이에서 살짝 고개 내밀다 다시 구름속으로 숨는다. 구름과 숨바꼭질 놀이를 즐기던 햇님도 지쳤나 보다.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둘쨋날의 일정은 여기를 마감으로 끝낸다. 오후 6시다. 숙소를 찾아 떠난다. 이곳엔 없어 마냥 달리다 1시간여 걸려 겨우 찾아낸 곳이 파주 월롱역앞 유일한 숙소다. 파주 용미리 마애불 석불입상2구를 만나기 위해서 그 방향이었다. 방이 딸린단다. 다행히 한 방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세쨋날:3월3일.수요일 월롱역-자운서원-화석정-반구정-윤관장군릉-파주 용미리 마애불 석불입상 여행 마지막 날이다. 서울홈까지 가까운 거리이기에 여러곳을 둘러보기로 일정을 짠다. 숙소에서 조식을 일찍 해결하고 오전 7시30분에 자운서원으로 이동이다. 30분소요로 8시에 정문앞 도착이었다. 문이 잠겼다. 9시부터 오픈인걸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왔다. 다른곳에 먼저 다녀오려는 순간에 키를 지니신 관리인을 주차장에서 만났다. 출근이었다. 개방시간 전엔 입장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저런 일로 왔다고 속닥속닥 대었더니 특별케이스로 바로 입장시켜 주셨다. 정문에 들자 바로 중앙에 잘 정돈 된 장독대와 휴식처가 있었다. 좌측 언덕숲엔 이이선생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자운서원 紫雲書院의 정문인 外三門 -紫雲門- 외삼문을 들어서면 東齋인 立志齋,西齋인 修養齋가 있으며 원생들의 기숙사이다 중앙에 공부하는 강당인 講仁堂을 지나면 內三門으로 文成祠에 이른다 문성사는 율곡선생의 영정과 그 제자인 沙溪 金長生(1543~1631)과 玄石 朴世采 (1631~1695)의 위패를 좌우로 모시었다 여현문(如見門) -栗谷 李珥선생의 가족묘역- 선산중심의 맨 위에는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 노씨의 묘, 그 아래에 이이의 맏형 부부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 그 아래에는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그 맨 아래는 이이의 맏아들 이경임의 묘가 있다 묘역을 마주하고 우측에 율곡의 큰 누님 이매창부부의 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묘 뒷쪽에 부인을 모셨다.이이의 묘소가 부모의 묘소보다 위쪽에 자리 잡은 이유는 많은 가설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곳은 조선전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자운서원 내에 위치하며 이 묘역을 중심으로 신사임당 묘를 비롯한 가족 묘 13기가 인근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이(李珥)는 중종(中宗)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明宗)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모두 아홉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호조(戶曹), 병조(兵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미리 알아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묘역은 부인 곡산 노씨(谷山盧氏)묘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봉분정면에 상석이 위치하며 오른쪽에 묘비가 있다. 그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을 세웠다.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율곡 기념관에서 초충도-신사임당...영상화면 3점 찰칵! 인근에 있는 화석정이다. 율곡이이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화석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며 온갖 상념에 젖는다 이어서 반구정이 있는 황희선생 유적지를 둘러본다. 경기도 기념물 제29호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기념관에서 자원봉사선생님의 해설도 들으며 게시물 몇점 디카에 담는다. 언덕 위 앙지대와 반구정... 반 구정은 황희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예로 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 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伴鷗亭)라고 이름지었단다. 임진강을 굽어보는 기암절벽 위에 두개의 정자가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높은쪽인 왼쪽은 앙지대, 아래쪽은 반구정이다. 황희(黃喜:1363~1452)가 1449년(세종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1983년 9월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449년(세종31)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전국 8도의 사람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 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앙지대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원래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현위치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하였다. 앙지문 상랑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호인)이라는 뜻으로 취했다"라고 적고 있다. 반구정 옆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드넓은 임진강 좌측하류쪽엔 한강과 합쳐 서해바다로 강화도로 나간다 긴 계단으로 오르면 앙지대 황희선생 영당지 관람을 마치고 마지막날 마지막 일정인 파주 용미리 마에불 석불입상2구를 만나러 간다. 이동중에 만난 기차다. 기차가 빠르게 지나간다. 긴 기차다. 볼만 했다. 가는길에 만난 윤관장군묘..잠시 들려 본다. 한 부분 확대한 시 구절이다. 마을을 내려다 본다. 굴뚝에서 연기가 한가로이 하늘로 피어 오른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마지막 일정인 용미리 마애블석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자동차는 "부릉~" 또 달린다. 경기파주 용미리 마애불석불입상2구(보물93호):고려초기(10 세기)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 경내) 龍尾里 마애불 석불입상의 뒷모습 이곳 용미리(龍尾里) 라는 지명은 광주산맥을 타고 들어온 용들이 한양에 머물렀는데그 꼬리가 이곳에 닿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용미리에 마애불이 새겨진 이유는 북에서 육로로 왔던 중국의 사신들이 묵던 숙소가 있던 벽제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벽제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 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이곳에 중국 사신들의 숙소가 있었다.(물론 지금은 화장터로 더 유명해져 버렸지만) 벽제에서 묵었던 중국 사신들이 다시 북으로 올라갈 때 이곳의 육로를 이용하였으므로 그들의 안전한 귀국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곳 용미리에 마애불을 세웠다고 한다. 이 2불상은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몸체로 하고 그 위에 머리를 따로 만들어 얹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을 취한 마애불로는 경북 안동 이천동 석불입상 (보물115 호), 충남 논산 상도리 마애불, 경북 봉화 봉성리 마애불 등이 있다. 게다가 고려 초기에는 불상이 거대화되고 지역별로 토속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런 특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용미리 마애불이다. 나란히 서 있는 2 개의 불상중에서 둥근 갓을 쓴, 왼쪽 불상은 남자상 (미륵불)으로서 양 손에는 무언가 (연꽃 등) 를 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네모난 모자를 쓴 오른쪽 불상은 여자상(미륵보살)으로서 두 손을 합장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 초기 선종의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가 아들 <한산후>를 낳기 위해 지금의 용암사 자리에 이 마애불을 만들어 놓고 공양하고 기도한 곳이라는데 이러한 사실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앞 왼쪽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 아래부분에 새겨져 있어 그 역사적 진실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용암사의 아름다운 魚形風磬이다 살랑바람이 지나면서 처마밑에 달린 풍경을 살짝 건드린다. "땡때앵~ 땡" 청량한 풍경소리가 귓가에 곱게 머문다. 2박3일간 경기북부 철원,연천,파주의 문화유적지 탐방을 잘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파주 율곡선생유적지에서..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
*2010.3월2-3일 여행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