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구자료

▷▶ 정조대왕 꿈이 실려있는 (수원화성)을 찾아서...

오색장미빛 2012. 3. 19. 09:48



 정조대왕의 꿈이 실려 있는 수원화성을 찾아가다 
2010.3.28.일요일
교통편
영동고속도로로 동수원 인터체인지로 나가면 10분안에 닿을 수 있고
전철로는 수원역이나 화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시면 수원역에서 팔달문이나 장안문 화서문 
가는버스가 많아 쉽게 갈 수 있다.

2010년 3월28일 일요일 수원화성 장안문

수원 화성에 대하여...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 곳이다.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건축의 백미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가 선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농축된 조선 시대 절정의 역량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 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활차(滑車)
·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성벽을 따라 펼쳐진 건축물들의 향연 
축성의 전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홍수 등을 거치며 일부 파손되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한 화성은 거의 6km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을 따라 마흔 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八達門)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을 포함한 4대문,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奉壽堂), 두 번이나 방화로 
소실되었다 복원된 서장대(西將臺),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독특한 시설물인 공심돈(空心墩), 군사적 목적의 이름으로는 
동북각루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자체 방어
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샛문인 암문 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원시는 매년 10월 화성문화제를 개최해 정조의 효심과 화성을 기리고 있다.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도 봄이 내려 앉았다.

2010년 3월28일 일요일 수원화성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수원시내 전경 눈부신 햇살이 창가에서 불러댄다. 봄나들이 가자고... 전부터 다녀오고 싶었던 수원화성이 갑작스레 떠오른다. 모처럼 휴일에 반려자와 함께 있는 날, 둘이 의견을 모아 10시45분에 출발이다. 하루 나들이여서 아주 간편하게 각각 디카하나씩 들고 겉옷만 챙겨 입고 나간다. 바람이 차다. 겨울바람이 아직도 남아 괴롭힌다. 옷을 두툼히 입었기에 한기가 스며 들지 않아 구경하기엔 별 지장은 없었다. 햇살엔 봄이 어려 있는데... 교통혼잡없이 씽씽 달려 1시간만에 수원 화성의 4대문중 서쪽에 있는 화서문에 도착했다. 장안문쪽으로 왔는데 주차시설이 없어서 삥 돌다가 오게 된 곳이다. 주차장은 눈에 띄지 않고 뒷골목 도로에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마침 한 곳이 비어 있어 그곳에 주차시켰다. 먼곳엔 가도 가까이에 있는 수원화성은 처음이다. 규모에 대단한 놀라움이다. 아기자기한 아주 멋스러우면서 예쁜 성이다. 중국 만리장성의 거대함만 빼면 그 못지 않은 한국인의 정서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성이다. 오길 참 잘했단 생각을 하면서 화서문을 출발점으로 성벽을 걷기 시작이다. 화서문(華西門) 봄 햇살을 머금고 피어난 샛노란 산수유꽃이다. 화서문앞 양지바른 정원에서 따스한 노란빛으로 우릴 반긴다. 화서문 측면을 담는다. 화서문 내부의 모습이다. 장안문 방향으로 성곽따라 걷기 위해 화서문 정문으로 올라와 이곳으로 나온다. 걷다가 만난 서북 공심돈(西北空心墩) 안으로 들어가서 홍이포를 살핀다. 홍이포(紅夷砲) 홍이포는 16세기 중국 명나라를 통해서 전래된 중화기로 네델란드인이 사용했던 화포라고 하여 '붉은 오랭캐의 화포' 즉 홍이포라 불렸다.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로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이 날아가나 포탄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했다. 길이는 2,150mm이고, 구경은 100mm이며, 사정거리는 700m이다. 멀리 보이는 장안문을 향해 걷는다.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의 국보1호 숭례문보다도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옆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포즈를 취하길래 한포즈 취한다. 이번엔 반려자의 포즈를 찰칵!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장안문은 옹성으로 둘러져 있다. 옹성으로 인해 장안문을 완벽히 보호할 수 있는 철옹성이라 할 수 있다. 옹성에는 누각을 올려 관측과 지휘가 용이토록 했다. 장안문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화염 공격에 대비하여 물로 불을 끌 수 있는 오성지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옮긴글 번화한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 차들이 가려 장안문 윗부분만 보인다. 쉬지않고 한참을 걷다 보니 속이 출출하다. 여기까지 걷고 일단 속을 채우기로 한다. 시계를 보니 오후1시가 되어 간다.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두리번 대며 장안문 건너편 좌측 골목길로 들어서니 먹자 골목인듯 했다. 참 번화한 골목인데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거니는 손님들이 별로 없어선지 음식점들이 한산하다. 계속 걸어가다 눈에 띄여 만난 음식점이다. 두팀의 손님들이 이미 회식중이었다. 영화국밥집..방바닥도 따뜻하고 찬도 정갈하게 나왔다. 편안도 하였다. 참고로 메뉴판도 찍어 올린다. 갈치조림이 먹고 싶어 들어 갔는데 메뉴를 바꿔 코다리찜 중으로 했다. 코다리찜에서 코다리를 거의 먹은 뒤에 사진을 찍었다. 먹다가 저렴하고 맛있는 이런 곳을 알려드리고 싶어 뒤늦게 찍게 되었다. 둘이 먹기에는 좀 많고 셋이 먹을 수 있는 양을 둘이 불룩하게 먹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점심은 늘 매식인데 식사할 음식점을 찾는것도 일이다. 하여 그 지역에 저렴하면서 맛있는 좋은 곳을 알려드리는 일도 좋은 일이지 싶어 이곳에 옮겨 놓는다. 한번 다녀가신분은 또 찾을 것 같다고 하니 안쥔님께서 그렇다고 한다. 영화국밥 *단체예약전화(031-248-8884) hp:011-346-2153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35-2 (수원화성 장안문 정문앞 길건너 골목)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장안문쪽으로 길을 건너오니 화성열차가 지나간다. 걷기 힘든 노약자분들이나 또는 즐기기 위한 분들이 이용하는 열차로 보인다. 우린 걷는것을 좋아해 그저 흥미롭게 볼 뿐이다. 이또한 수원화성의 볼거리다. 다시 장안문 계단로 올라가 성벽따라 걷는다 향수어린 써커스단 천막이 보인다. 취학전인 아주 어린시절에 보았던 써커스! 어린시절로 되돌아가 당시의 재미있게 보았던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 오른다. 화성 화홍문 [華城 華虹門]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화성의 북쪽 수문. 수원화성의 북수문이며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지어져 있으며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이다. 누상에 오를 때에는 좌·우 측면에 있는 돌 계단을 이용한다. 7개의 홍예문 중에 중앙의 1칸만이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바깥쪽에는 철전문을 설치하여 적의 침투를 막았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 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8경 중에 하나로 꼽는다. 1794년(정조 18) 음력 2월 28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1795년(정조 19) 정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화홍문의 아름다운 여러풍경을 담는다. 화홍문앞 川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 訪花隨柳亭) 동북각루(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풍경 아래를 바라보니 용연이... 화성열차를 또 만난다. 싸인보드를 보며 발걸음 잠시 멈춘다. 연무대 방향으로 간다. 250M를 더 가야된다. 화성 동장대 [華城東將臺] 경기도 수원시 화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있는 조선시대 장대(將臺: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 연무대라고도 한다.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 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요충지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하였으며, 바닥을 돌로 깔아 말을 타고도 장대에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의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操鍊場)을 만들었다. 부속사(附屬舍)는 창고로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단층 3량 집이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1795년(정조 19) 7월 15일 묘시(卯時 6시)에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8월 10일에 상량하고,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화성열차가 시발점인 연무대로 들어 오고 있다. 화성열차 내리고 타고... 연무대에서 발길 되돌려 오던길로 다시 성벽을 걷다가 솔숲에서 잠시 쉬어간다. 동북각루에서 바라보이던 용연으로 내려 온다 용연에서 동북각루를 올려다 본 풍경 용연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청둥오리들의 유영에도 봄기운이 어려 있었고, 방화수류정 아래 산수유의 꽃가지에도 샛 노란봄이 곱게도 물들어 있었다. 용연에서 흘러 내리는 냇물, 원래부터 용머리 모양의 배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풍의 배수구라는 느낌이다. 징검다리도 건너서 화홍문 아래 성벽따라 서장대를 향해 계속 오른다, 화성 서장대 [華城西將臺]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조선시대 장대 (將臺: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뒤편에는 8면의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또한 현재는 복원이 안됐으나 후당(後堂) 3칸을 지었다. 서쪽 두 칸은 온돌이고, 동쪽 1칸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문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다. 이곳은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성곽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 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였고,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정조가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을 직접 썼다.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수원시는 속 시원한 하나의 파노라마다. 절경이다. 그 절경을 여러점 이곳에 담는다. 이번엔 반려자와 나란히 나란히...서장대에서 저 아래 화성행궁이 조그맣게 보인다. 저기까지 가야 하는데... 다리가 풀리고 기력도 딸린다. 그러나 온 김에 둘러 보기로 한다. 서장대에서 내려 가는 지름길이 있으나 자동차를 이용하기로 한다. 수원시내 도로 이정표 따라 이동이다. 10분정도 소요의 가까운 거리다. 화성행궁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에 있는 행궁(行宮) 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華城:사적 3)의 부속물이다. 1796년(조선 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莊祖:장헌세자)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과 경룡관(景龍館)·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노래당(老來堂)·신풍루(新豊樓) ·남북군영·강무당(講武堂)·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집사청(執事廳)·서사청(書史廳) ·비장청(婢將廳)·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影殿)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2010년까지 이어질 2단계 사업에서는 신풍초등학교가 위치한 우화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별주, 내포사 등 화성행궁의 나머지 3개 건물 94칸과 행궁담장 등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두산백과에서 옮김 화성행궁 봉수당 [華城行宮奉壽堂]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여 같은 해 9월 25일 완공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수당(奉壽堂)이라는 건물 이름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정조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으며, 뒤에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편액을 썼다. 1795년(정조 19) 이곳에서 헌경왕후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화성행궁 봉수당 어좌 긴 벽면에 그려진 "반차도 [班次圖]" 그림중 세점만 이곳에 옮긴다. "반차도"는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반차도(班次圖) 이곳 반차도는 1795년 윤2월 조선22대왕 정조대왕께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 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779명의 인원에 779필의 말이 그려진 그림으로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또는 화성행차도(華城行次圖)라고도 한다. 정조 "정가교" 혜경궁 홍씨의 "자궁가교" 청연군주의 "군주쌍교" 걷다가 걷다가 장독대에서 잠시.. 화성행궁 경룡관 [華城行宮景龍館] 화성행궁의 부속건물이다. 1794년(정조 18) 건립된 헌경왕후(혜경궁홍씨)의 처소인 장락당(長樂堂)으로 들어가는 누문(樓門)이다. 10.5칸 규모이며,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하였고, 위층엔 누마루를 깔고 4면에 평난간을 둘렀으며 그 위에 분합을 달았다. 경룡(景龍)은 제왕을 상징하는 용을 의미하며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로부터 딴 이름이다. 전판서 조종현(趙宗鉉; 1731~1800)이 쓴 ‘경룡관’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화성행궁 장락당 [華城行宮長樂堂]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랑문에서는 '빛나는 궁월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이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영화 "왕의 남자"를 촬영한 곳으로 더 유명해졌다. 침소에 들기 전 혜경궁 홍씨 장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마당에서 만난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다시 봉수당 마당으로 나오면서 길게 포즈를 취한다. 풀린다리도 쉴겸 휴식이다. "찰칵!" 뽐도 잡으며 참 편안한 휴식이다. 화령전 [華寧殿] 화령전 운한각 내부에 모셔진 정조대왕 어진. 군복을 입고 있다. 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정조대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봉안각이다. 정조대왕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입은 초상화를 모셨다.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사서삼경의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는 귀령부모'에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전각이었다. 정조의 사당인 이 곳에서는 역대 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 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한 것이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종의 어진을 봉안한 정전, 화재나 홍수 등 만약의 사태가 났을때 정종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그리고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등이 있다. 운한각(雲漢閣) 까치 두마리가 우물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다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다. 자리를 피해 주었더니 두마리중 다시 한마리가 날아와 물을 마시려다 말고 나를 쳐다 본다. "까치야! 해코지 안한다." "어여 맘 놓고 물 마시도록 해요." 낙남헌(洛南軒)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군사들에 대한 호궤(호饋 : 군사들을 배불리 먹임)를 이 곳에서 하였으며, 수원 향교의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배알한 후 이 곳에서 별시(別試)를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방방(放榜)]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낙남헌에서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養老宴)을 시행하였 다. 낙남헌에서의 양로 잔치는 혜경궁의 회갑연인 만큼 당년 61세인 수원부의 백성은 모두 참여토록 하였으며 문관, 음직, 무관 및 본부 경내에 있는 조관(朝官)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을 참여 대상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채제공이 양로연을 축하하는 악장‘화일곡(化日曲)’을 지어 올렸으며, 정조는 혜경궁의 만만년을 축수(祝壽)하는 시를 짓고 참가자 모두 화답하는 시를 써서 제출하게 하였다. 양로연에 참석한 사람은 수가노인(隨駕老人) 15인과 화성노인(華城老人) 384인이었고, 이들에게는 비단 1필(匹)씩을 하사(下賜)하였고, 당시 양로연의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기록과「양로연도」등에 잘 나타나 있다. 1797년(정조 21) 8월 18일에는 이 곳에서 화성유수부의 무사를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치러 상을 차등에 따라 주기도 하였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지식에서 경룡관(景龍館) 경룡관은 장락당의 외문(外門)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景龍)이란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唐太宗)이 거처한 궁궐 이 름에서 따 왔다. 당태종은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일컬어진 훌륭한 정치를 펼쳐 당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태평성세를 구가하여 제왕의 모범으로 꼽히 는 인물이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의 편액은 천은 조종현(天隱 趙宗鉉 : 1731∼ 1800)이 썼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에 황승원(黃昇源 : 1732∼1807) 이 지었는데,“법도는 정관제의 아름다운 규모를 본떴고, 구슬 같은 편액이 빛 을 받아 찬란하니 대체로 복희씨의 아름다운 상서를 드리운 듯하구나.” 라고 표현하였다. 건물은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네이버지식에서 드라마 촬영지 "대장금" 두 주인공 사이에서... 해는 늬엿늬엿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하룻동안 많이도 걸었다. 실은 융건릉까지 계획이었는데 용주사와 그 곳은 다음기회로 돌리고 마이홈으로 내 달린다. 달리는 도중에 팔달문을 만나 운전석 옆에서 담는다. 팔달문 (八達門)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긴 시간동안 쉬지도 않고 걷고 걷느라 시간 소요가 많았다. 그러나 땅거미 내려앉기 전에 도착했다. 오늘도 예전처럼...! 오늘 다녀온 수원화성을 다시 살펴 보며 아름다운 풍취에 잠긴다. 오늘 다녀 온 곳은 서장대부터 동장대까지다. 화서문-방화수류정-동장대-오던길 다시 되돌아 화서문-서북각루-서포루-서장대, 그리고 화성행궁을...! 서암문-팔달문-창룡문-동북공심돈 코스는 다음기회로 미룬다. 찬란한 우리문화재에서 찬란한 기운을 듬뿍 받은 봄나들이였다.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 * 2010.3.28.일요일..1일 나들이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