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함께 일하는 옛 전쟁터에서 다시 봄날이 왔다.
짚차를 타고 도주하던 미군 병사들(차 양쪽의 손을 든 사람들)을
사로잡은 중공군 병사들.
중국 인민지원군의 시각으로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집이 나왔다.
<영광스런 중국 인민지원군>(중국 해방군화보사, 1959년)의 사진과 사진설명을 따서 펴낸 [그들이 본 한국전쟁](눈빛출판사)이 그것. 원저는 중국 인민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그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홍보를 위한 시각이 다분하지만 압록강 도하, 그들에게 잡힌 미군포로, 인해전술때 불어제낀 날라리, 폭격을 피하기 위한 물밑다리 등 우리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의 나머지 반쪽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 끝 무렵 후방에서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뛰어들어 활동한 사실은 이채롭다. 전투가 없는 날 중공군 병사들이 민가 아낙네의 봄 밭갈이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북한 위문단이 지원군 시공부대에 와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사업에 투입된 중국군 병사들이
북한 주민들과 함께 포탄 구덩이들을 메우고 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북한 주민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지원군을 위해 밥과 물을 나르고 있다.
1951년초 눈 덮힌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맞춰 돌진하는 중국군 병사들.
김일성이 직접 중공군 1차 귀국 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갓을
지원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열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중공군 귀국장병들을 환송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의 한 노인이 지원군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출정한 중국 민간인 수송대의 우마차 행렬이
눈밭 속에서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다.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필자 주>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